
저는 주말 밤에 가볍게 볼 액션 영화를 찾다가 <길복순>을 틀었습니다. 전도연이 청부살인업자로 나온다는 것만 알고 봤는데, 솔직히 처음엔 "전도연이 액션을?" 싶은 마음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킬링타임용 액션으로는 충분히 즐길 만했고, 의외로 그 안에 사춘기 딸을 둔 엄마의 이야기가 깔려 있어서 생각보다 곱씹게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변성현 감독의 이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표면적으로는 청부살인업계의 암투를 그리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밖에서는 완벽한 프로페셔널이지만 집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부모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도 보면서 그 지점이 의외로 마음에 남았습니다.
밖에선 최고의 킬러, 집에선 작아지는 엄마
극 중 길복순이 업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비결은 탁월한 '시뮬레이션' 능력과 '약점 파악'에 있습니다. 첫 시퀀스에서 야쿠자와 대치할 때, 그녀는 무모하게 칼을 섞는 대신 머릿속으로 수십 번의 모의 전투를 치르며 필패의 확률을 계산해 냅니다. 나아가 상대가 가진 고루한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심리적 약점을 파고들어, 명검을 쥐여주고는 허무하게 총으로 제압해 버립니다. 이처럼 그녀는 변수 하나 없는 완벽한 통제력으로 상대를 도륙하는 베테랑입니다.
하지만 이 완벽한 통제력은 집 문을 여는 순간 무용지물이 됩니다.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은 단숨에 꿰뚫어 보면서도, 굳게 닫힌 10대 딸 재영이의 방문 너머에 있는 마음은 도무지 읽어내지 못합니다. 밖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하지만, 딸의 차가운 눈빛 앞에서는 전전긍긍하는 복순의 모습은 직장 생활과 육아 사이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부모들의 피로감과 깊게 맞닿아 있어 씁쓸한 공감을 자아냅니다.
차민규의 마지막 선택이 남긴 것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소속사 대표이자 복순을 킬러로 길러낸 스승, 차민규와의 마지막 대결이었습니다.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 이 절망적인 매치에서 복순이 승리를 확신한 이유는 단 하나, 차민규가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는 본질적인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약점(다친 오른손)을 넘어 상대의 감정까지 철저히 이용하는 복순의 서늘함은 킬러로서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결투의 진정한 반전은 차민규의 죽음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복순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복순이 딸에게 자신의 진짜 직업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모녀 관계를 망치고 있음을 알았던 그는, 자신이 죽는 순간을 딸 재영이 태블릿 PC를 통해 실시간으로 목격하도록 설계해 둡니다. 냉혹한 살인마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은연중에 암시되는 자신의 핏줄일지도 모르는 딸을 위해 남긴 잔혹하면서도 묘하게 슬픈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빌런 캐릭터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뀌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진실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모녀를 가로막던 가장 큰 장벽을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난초로 풀어낸 엄마와 딸 이야기
영화는 '난초'라는 상징적인 매개체를 통해 부모의 양육 태도를 조명합니다. 시든 잎을 일일이 잘라내며 온실 속 화초처럼 딸을 보호하려 했던 복순은, 자신의 폭력적인 DNA가 딸에게 유전되었을까 봐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완벽한 엄마로 포장하고 싶었던 강박은 역설적으로 딸이 자신의 고민을 엄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철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통제대로만 자라지 않으며, 때로는 부모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공정하게 싸워야 한다"는 딸의 무심한 한마디는, 타협을 모르던 냉혈한 복순이 의뢰받은 타깃을 살려두고 회사와 각을 세우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후반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엄마의 끔찍한 진짜 모습을 보고도 "수고했어"라고 말해주는 딸의 장면에서 저는 잠깐 멈칫했습니다. 킬링타임으로 가볍게 보던 액션 영화에서 이런 감정적인 한 방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부모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때 비로소 자식과 진짜로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이 장면이 조용히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킬링타임 액션인 줄 알았는데
정리하면 <길복순>은 화려한 액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이야기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 별점 5점 만점에 3점을 드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로 봤을 때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액션과 가족극 사이에서 톤이 살짝 어정쩡하게 느껴지는 구간도 있어서 그 이상의 점수는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전도연의 연기와 차민규와의 마지막 대결만큼은 분명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가볍게 액션을 즐기고 싶으신 분이라면 주말 밤에 틀어보시기 좋은 영화입니다. 여러분은 액션 영화 안에 가족 이야기가 섞여 있을 때, 그게 더 좋으신가요 아니면 액션에만 집중하는 쪽이 더 좋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