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놈을 악당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다가 예상 밖의 감정을 느낀 적 있으십니까? 저는 넷플릭스에서 베놈을 발견하자마자 틀었습니다. 오래된 마블 팬으로서 베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로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제가 알고 있던 베놈과는 꽤 달랐습니다. 무섭기만 한 괴물이 아니라, 묘하게 인간적인 면이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안티히어로라는 틀, 베놈이 그 안에서 꺼낸 것
안티히어로(Anti-hero)란 전통적인 영웅의 덕목, 즉 이타심이나 도덕적 순결함이 결여된 채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캐릭터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착하지 않은데 주인공인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안티히어로 영화는 주인공이 어둡고 냉소적인 색채를 유지해야 매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 경험상 베놈은 그 공식을 살짝 비틀었습니다. 오히려 어수룩하고 망가진 인간 에디 브록과, 그 안에 깃든 폭력적인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Symbiote)의 엉뚱한 공생 관계가 이 영화의 진짜 온도를 만들었습니다.
심비오트(Symbiote)란 숙주 생물의 몸에 기생하며 함께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를 뜻하는 마블 코믹스의 고유 용어입니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공생(Symbiosis)에서 가져온 단어인데, 이 영화에서는 숙주와의 상성(相性), 즉 궁합이 맞지 않으면 숙주가 사망한다는 설정이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설정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단순히 힘을 빌려주는 도구가 아니라 진짜로 합이 맞아야 살아남는 관계라는 게, 인간 관계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리포터 에디 브록이 대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비리를 캐다가 직장과 연인을 동시에 잃는 도입부는 사실 익숙한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실험실에 잠입했다가 심비오트에 감염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에디의 몸속에서 베놈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오고, 둘이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이 영화는 SF 액션이라기보다 버디 코미디(Buddy Comedy)에 가까워집니다. 버디 코미디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존재가 함께 사건을 헤쳐나가며 관계를 쌓는 장르 문법을 뜻합니다. 2018년 개봉 당시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SSU)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만큼, 이 낯선 조합이 얼마나 통할지가 관건이었습니다.
심비오트 설정의 매력과 개연성의 구멍
제가 가장 감탄했던 장면은 베놈이 에디의 몸에서 분리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첫 장면이었습니다. 검은 점액질이 온몸을 뒤덮으며 거대한 괴수로 변하는 그 비주얼은,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길고 날카로운 이빨과 긴 혀는 마블 코믹스의 원작 베놈 이미지를 충실하게 재현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코믹스 베놈을 알고 있었는데, 실사화된 모습이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놈이 가진 가장 독특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재생 능력(Regeneration)입니다. 재생 능력이란 신체 손상이 발생했을 때 빠른 속도로 회복하는 특성으로, 베놈은 팔다리가 부러지는 수준의 부상도 순식간에 복구합니다. 이 설정 덕분에 액션 장면에서 베놈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반복됩니다. 거기에 베놈의 약점으로 설정된 특정 주파수 소리는 실제로 심비오트가 음파에 취약하다는 마블 원작 설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영화 내에서 MRI 장치가 그 역할을 합니다.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야기의 개연성(蓋然性)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개연성이란 이야기 안에서 원인과 결과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납득이 가는 정도를 뜻합니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사건이 전개되는 장면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빌런 칼튼 드레이크의 동기가 너무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최종 대결의 긴장감이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가진 한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빌런 칼튼 드레이크의 동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입체적인 악역의 매력이 부족합니다.
- 에디가 실험실에 잠입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간단하게 처리되어 긴장감이 금방 풀립니다.
- 심비오트 간 합체와 분리의 원리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클라이맥스에서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 주요 조연 인물들의 서사가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채 사건에 끌려다니는 느낌을 줍니다.
일반적으로 마블 영화는 세계관 구축과 인물 서사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베놈은 그 기준을 온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107분을 빠르게 느낀 건, 결국 에디와 베놈의 케미가 이 모든 약점을 덮어버릴 만큼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톰 하디의 1인 2역, 이 영화가 살아남은 이유
베놈이라는 캐릭터를 논할 때 톰 하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에디 브록이라는 인간 역할과 베놈의 모션 캡처(Motion Capture) 및 목소리 더빙을 동시에 소화했습니다. 모션 캡처란 배우의 실제 움직임을 디지털로 기록하여 CG 캐릭터에 적용하는 기술로, 베놈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어색하지 않은 데에는 톰 하디의 신체 연기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되새겨보니, 베놈의 움직임이나 목소리 톤에서 에디와 공유되는 어떤 결이 있다는 게 납득됐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예상치 못했던 감정은 베놈이 에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왔습니다. 사람을 잡아먹겠다고 으르렁대던 그 괴수가,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 남기로 결심하고 에디를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으로 감싸는 장면은 솔직히 조금 뭉클했습니다. 마블 코믹스에서 베놈은 주로 스파이더맨의 안티테제(Antithesis), 즉 영웅의 거울상이자 어두운 반대편으로 묘사됩니다. 안티테제란 어떤 존재의 반대 개념 혹은 대조적인 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영화는 그 원작의 설정을 살리면서도, 베놈 자신이 점차 인간 에디에게 감화되어 가는 변화 과정을 담아냈습니다.
마블 공식 캐릭터 소개에 따르면(출처: Marvel.com), 베놈과 에디 브록의 관계는 단순한 기생 관계가 아니라 '공생적 결합(Symbiotic Bond)'으로 정의됩니다. 이 공생적 결합이란 두 존재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영화가 이 부분을 코믹하게 풀어낸 덕분에,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가 오히려 가볍고 경쾌하게 느껴졌습니다.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의 흥행 기록을 보면(출처: Box Office Mojo), 베놈은 전 세계 누적 8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소니 역대 마블 영화 중 손꼽히는 흥행작이 됐습니다. 개연성의 빈틈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극장을 찾은 이유는 결국 톰 하디와 베놈이라는 조합에 있었다고 봅니다.
베놈은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봐도 이야기의 허점이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 보고 나서 별 다섯 개 만점에 4점을 줬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에디와 베놈이라는 두 존재가 만들어내는 케미가 그 모든 결점을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마블 팬이라면, 혹은 그냥 가볍고 시원한 액션 영화 한 편을 찾고 있다면 베놈은 충분히 볼 만한 선택입니다. 베놈 2, 베놈 3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를 먼저 시작하고 싶다면 이 첫 번째 작품부터 순서대로 보시는 걸 권합니다.
'해외 영화 솔직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신원 미상의 여자 리뷰 (누아르 분위기, 각본 실망, 원작 이식) (0) | 2026.06.12 |
|---|---|
| 러브 앤 몬스터스 리뷰 (크리처 디자인, 세계관, 스토리) (0) | 2026.06.09 |
| 영화 폴 600미터 솔직 후기 (그레이스 풀턴 버지니아 가드너, 스릴러 영화, 별점 3점) (0) | 2026.06.02 |
| 영화 올드 가드 솔직 후기 (샤를리즈 테론, 넷플릭스 액션, 별점 3점) (0) | 2026.05.22 |
| 영화 레블 리지 솔직 후기 (제레미 솔니에 감독, 넷플릭스 액션 스릴러, 별점 4점) (0) | 2026.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