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주말 저녁에 볼 만한 영화를 찾다가 그린 북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다시 보게 됐고, 그제서야 "아직도 안 봤네" 싶어서 틀었습니다. 솔직히 2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질 줄 몰랐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한참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음 날까지 자꾸 몇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왜 그랬는지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그린 북이 대체 뭔지 알고 계십니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린 북'은 1930년대에 출판된 '흑인 운전자들을 위한 초록색 책'에서 유래했습니다.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여행 가이드북이 인기를 끌었지만, 흑인들은 일반적인 가이드북을 사용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의 많은 호텔, 음식점, 심지어 주유소와 화장실까지 백인 전용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흑인 운전자가 백인 운전자의 차를 추월하면 안 된다는 황당한 법까지 존재했던 시대였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차를 추월하는 것까지 법으로 막았다는 사실이 상상이 안 됐거든요. 영화 속 토니가 주유소에서 닥터 셜리의 차 주유를 거부당하는 장면이 바로 이런 법의 현실이었던 겁니다.
이러한 차별의 법적 근거가 바로 '세그리게이션 로우', 속칭 '짐 크로우 법'입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흑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이 만들어졌지만, 남부 사람들은 화이트 맨스 리그나 레드 셔츠 같은 정치 깡패 조직을 만들어 흑인의 투표를 방해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투표한 적이 없으면 투표할 수 없다거나 문맹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흑인들의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했습니다. 연방 대법원은 플레시 사건에서 "흑인과 백인에게 동등한 수준의 공공시설이 제공되기만 한다면 인종별로 따로 제공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다"라고 판결하며 '세퍼레이트 벗 이퀄(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 원칙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미명에 불과했습니다. 1961년 아프리카 대사가 메릴랜드 주 음식점에서 쫓겨난 사건은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차별이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예입니다.
남부 흑인 차별은 왜 그렇게 심했을까요
미국 남부의 흑인 차별은 유독 심했습니다. 남부는 담배와 목화 농장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갔고, 그 노동력은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이었습니다.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는 폐지됐지만, 남부는 노예제에 뿌리를 둔 사고방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1866년 흑인 인권 보장법이 생긴 지 90년이 지난 1950년대까지도 남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영화 속 닥터 셜리가 남부로 내려갈수록 위험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우정 이야기였습니다
영화 '그린 북'이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두 가지 탁월한 트위스트가 있습니다. 첫째, 닥터 셜리는 경제적·문화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인물입니다. 백인들이 고급 문화라고 인정하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이며, 미국 남부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백인보다 학식이 높고 언행이 정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는 핑계가 단지 핑계일 뿐이며, 실제 차별은 순전히 피부색에 기반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둘째, 셜리 박사의 운전사인 토니 발레롱가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계입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되는 일을 주로 하며 많은 차별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역시 미국 내륙에서는 100% 백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은 인종차별에 대해 더 복합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감탄한 부분은 입체적인 캐릭터 구성이었습니다. 고상하고 교양 있지만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해 고독한 돈 셜리, 그리고 거칠고 무식해 보이지만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토니. 토니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으며 돈 셜리에게 권하는 유쾌한 장면이나, 빗속에서 돈 셜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절규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내면의 벽이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저는 이 빗속 장면에서 정말 울컥했습니다. "나는 흑인도 백인도 아니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못하다"는 닥터 셜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귀에 남았습니다. 비고 모텐슨과 마허샬라 알리, 두 배우의 눈빛 연기가 진짜 예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내 친구는 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선입견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닥터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는 함께 차를 타고 여행하며 동고동락하는 과정에서 선입견을 넘어 진정한 우정을 쌓아갑니다. 이는 편견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기 전에 그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하며 친구가 되어본다면,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제 편견을 돌아봤습니다. "내가 저 사람에 대해 모르는 채로 판단한 게 얼마나 많았나" 싶었거든요. 영화 한 편이 이렇게 오래 남는 건 진짜 오랜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린 북을 아카데미 작품상감으로는 살짝 과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그 평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따뜻한 로드 무비로 풀어낸 솜씨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5점 만점에 5점. 아직 안 보신 분이 계시다면 주말 저녁에 꼭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다 보시고 나면 저처럼 한동안 소파에서 못 일어나실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