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윅 시리즈가 끝나고 나서도 그 세계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경험, 혹시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극장에서 발레리나를 봤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30분만 버티면 그 이후는 액션 영화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존 윅 세계관 확장, 어디까지 왔나
라이언스 게이트가 존 윅 시리즈로 재미를 본 이후 이 암살자들의 세계를 어떻게 키워나갈지 지켜봤던 분들이라면 발레리나라는 스핀오프(Spin-off) 소식에 반응이 엇갈렸을 겁니다. 스핀오프란 기존 시리즈의 세계관을 공유하되 새로운 인물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파생 작품을 뜻합니다. 드라마 컨티넨탈에 이어 이번엔 아예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처음엔 "할리우드가 또 할리우드했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작품이 세계관을 다루는 방식은 생각보다 공들여 있었습니다. 존 윅 3에서 잠깐 등장했던 루스카 로마(Ruska Roma)가 본격적으로 무대 위로 올라오거든요. 루스카 로마란 존 윅 시리즈에 등장하는 암살자 양성 집단으로, 발레를 훈련 수단으로 삼는 독특한 조직입니다. 이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발레리나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그려집니다.
안젤리카 휴스턴이 연기한 디렉터(The Director) 캐릭터도 이번에 훨씬 깊이 파고들어졌습니다. 냉혹하면서도 묘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마다 눈이 갔습니다. 그리고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이 직접 등장해 주인공 이브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단순한 팬 서비스 이상의 긴장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그 시퀀스에서 주변 관객들의 반응이 확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이 단순히 같은 간판을 붙이는 게 아니라 이런 장면 하나에서 증명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레리나가 세계관 확장 측면에서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주인공 이브의 복수 대상인 조직의 정체가 끝까지 불분명하다는 겁니다. 사이비 종교 단체처럼 묘사되긴 하는데, 리더가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브의 아버지는 왜 그 조직을 떠나려 했는지, 조직은 왜 이탈자를 죽이는지 같은 핵심 질문들이 끝까지 답을 얻지 못합니다. 세계관이 넓어지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구멍이 생기는 느낌이었습니다.
발레리나만의 액션 연출, 존 윅과 무엇이 다른가
영화에서 교관이 이브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처럼 싸워라." 이 대사가 발레리나의 액션 철학을 통째로 요약합니다.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란 원래 무용의 동작을 설계하고 배치하는 기술을 뜻하는데, 액션 영화에서는 격투 동작을 짜는 방식 전체를 가리킵니다. 발레리나의 액션 코레오그래피는 이브가 선천적으로 체력과 완력에서 불리하다는 설정을 그대로 반영해 설계되어 있습니다.
존 윅이 한 분야만 수십 년을 파고든 장인의 방식이라면, 이브의 액션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삼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이브가 사용하는 무기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양한 종류의 칼 — 상황에 따라 근접전과 투척에 모두 활용
- 도끼 — 밀폐 공간에서의 압도적인 위협감 연출
- 수류탄 — 석조 건물의 구조를 역이용해 다수를 동시에 상대
- 화염방사기 —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무기를 총기에 가깝게 연출
- 스케이트 — 일상 도구를 살상 무기로 전환하는 아이디어의 극단
이 목록을 보면 무기 자체보다 공간 활용이 핵심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수류탄으로 싸우는 장면에서 이브가 굳이 총을 내려놓고 석조 건물의 구조를 이용해 혼자 다수를 상대하는 방식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염방사기와 소방호스가 맞붙는 장면은 말로 설명하면 황당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화염방사기가 저렇게 근접전 무기처럼 연출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감독인 렌 와이즈먼은 언더월드로 데뷔해 다이 하드 4.0으로 절정을 찍은 뒤 토탈 리콜을 말아먹고 한동안 드라마 연출로 물러나 있던 감독입니다. 오랜만에 극장 복귀라 불안했는데, 결과적으로 다이 하드 팬다운 거칠고 무자비한 감각이 살아있었습니다. 특히 이브가 발레 동작에서 자연스럽게 격투로 전환하는 흐름은 시각적으로 정말 세련되었습니다. 아나 데 아르마스가 실제로 발레와 전투 훈련을 직접 소화했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을 만큼 몸의 움직임에 우아함과 파괴력이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액션 영화의 격투 설계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IndieWire의 액션 코레오그래피 분석을 참고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카메라와 동선이 맞물려야 이런 장면이 나오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스토리 한계와 발레리나가 남긴 것
발레리나가 분명히 넘지 못한 벽이 있다면 스토리의 진부함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복수를 위한 훈련, 배후 파악, 최종 결전으로 이어지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뼈대를 뜻하는데, 이 뼈대가 너무 익숙합니다. 테이큰이 그랬고, 아저씨가 그랬습니다. 이 영화들이 사랑받은 건 공식이 신선해서가 아니라 그 공식 안에서 캐릭터와 세계관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발레리나는 존 윅 세계관을 빌려왔음에도 이브라는 인물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복수에 집착하는 사람의 심리가 깊이 파고들어지지 않으니 아나 데 아르마스의 뛰어난 액션에 비해 캐릭터 자체에는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중반부쯤에는 다음 장면이 충분히 예상될 정도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반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캐릭터 소비 방식도 아쉬웠습니다. 국내에서 캐릭터 포스터까지 등장한 최수영 씨와 박정동 씨는 실제 영화에서 기대만큼의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특히 최수영 씨는 제가 다 원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포스터와 실제 분량의 괴리가 이렇게 크면 관객 입장에서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발레리나를 나쁜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액션 연출 하나만 놓고 보면 한국 영화와의 자원 차이가 확실히 느껴질 만큼 수준이 다릅니다. 제가 직접 비슷한 시기에 국내 액션 영화를 보고 발레리나를 연달아 봤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가 민망해질 정도였습니다. 이게 단순히 제작비의 차이에서만 오는 건지, 아니면 설계와 철학의 차이인지는 Variety의 발레리나 리뷰에서도 짚고 있는 부분입니다.
정리하면, 발레리나는 별 세 개짜리 영화입니다. 서사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액션 자체를 좋아하신다면 F1 이후로 가장 강하게 극장 관람을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초반 30분은 이브의 어린 시절과 훈련 과정이라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는 감탄이 멈추지 않는 장면들이 계속됩니다. 존 윅 팬이시라면 반가운 장면도 있고, 순수 액션 팬이시라면 뷔페처럼 다양한 무기 액션에 만족하실 겁니다. 기대치 조절만 잘 하시면 충분히 남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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